1.시작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인도를 찾아가는 신항로를 개척하는데 가장 앞장선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희망봉을 발견하고, 인도를 거친 포르투갈의 무역선은 머나먼 동쪽나라 일본에 이르렀고
마침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 있던 전국시대에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전해주게 된다.
전국시대에 유입된 조총은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렸고,
수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막판에 어처구니 없는 배신으로 전국통일이라는 과실은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돌아갔지만...
다만 포르투갈은 무기만 수출한 것이 아니었다.
조총과 함께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선보이게 되니 이것은 교리 자체가 참으로 신선한 사상이었다.
천황보다 위에 있다는 하나님과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평등사상은 막부에게 있어서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천주교 신자가 늘어나게 되고, 세력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게 된다.
실제로 1637년 시마바라에서는 무거운 세금과 천주교 탄압에 짓눌린 백성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이 발생했고, 여기에 가담한 천주교 신자만 3만 7천명에 달했다.
결국 진압되긴 했지만, 이를 계기로 에도 정부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실감했고
일본 국내에서 천주교를 엄격히 금지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의 명물이 된 카스테라는 스페인의 스펀지케이크가 전래된 것이다.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만들어 먹던 빵이라고 해서 '카스테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처형된 26인 성인순교지.
자세히 보면 두 명의 나이어린 소년도 눈에 띈다.
2. 포르투갈 다음으로 일본에 접근한 네덜란드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포르투갈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틈을 타, 네덜란드가 접근한다.
당시 네덜란드는 구교와 신교의 대립 속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만든
신생국가였기 때문에 구교였던 포르투갈과는 대립관계였다.
이들은 구교인 천주교의 악습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강압적으로 포교하려고 하지 않았고, 칼뱅의 실용주의를
따라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나라였기에, 상업과 종교를 엄격히 분리한 에도 정부의 조건에 순순히 응해왔다.
하지만 크게 당한(?) 적이 있던 에도 막부는 이들이 혹시라도 기독교를 전파할까 싶어
에도에서 먼 규슈의 어촌 나가사키를 통해서만 교역할 것을 허가했고,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인들의 집단 거류지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데지마'다.
데지마는 부드러운 곡선 모양의 인공섬으로 육지와는 달랑 다리 하나로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접근할 수가 없었고,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비록 서양인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나가사키 시민들은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당시 네덜란드를
뜻하는 홀랜드(Holand)를 일본어로 발음해 '오란다상'이라고 불렀다.
이 오란다상이라는 명칭은 이후에 코가 크고 피부가 하얀 백인들은 총칭하는 단어로 발전해, 그들이
다니던 거리를 '오란다 자카'라고 부르는 등, 서양인의 대명사가 된다.
▶네덜란드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인공섬 데지마.
현재는 주변이 매립되었지만 에도시대만 해도 단 하나의 통로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고립된 섬이었다.
▶데지마에 있는 유적에는 'VOC'라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로고가 남아있다.
▶네덜란드인들이 거닐던 오란다 자카. 반듯하게 정비된 이곳 주변에는 현재 학교와 주택이 들어서 있다.
3.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꽃핀 학문, '난학'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데지마를 중심으로한 네덜란드의 학문은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측량술, 조선술 등 수많은 서양식 학문이 전해졌는데, 이중 일본인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외과수술이었다.
당시의 의학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한방이 전부여서 기껏해야 침을 놓는 것이 전부인
동양의학의 입장에서 실제로 살을 찟고 뼈를 자르는 서양의 외과수술은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것은 데지마를 출입하던 일본 지식층을 통해 전파되었고, 여러 난방의(蘭方醫)들의 노력으로 1774년에는
일본 해부학의 신기원을 마련한 '해체신서'가 발간되기에 이른다.
난학을 통해 축적된 지식은 개화기 시절 새로운 학문을 찾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난학을 공부한
사람 중 탈아입구론을 주장하며 일본 근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기도 한다. 이들이 일본 근대 문명과 메이지 시대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데지마를 중심으로 서양식 학문이 유입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끈 것은 서양식 외과 수술과 해부학.
에도시대 후기에는 '난학'이라고 해서 네덜란드에서 유입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 1만엔권 앞면을 장식하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화.
난학을 배우고자 열아홉 살에 나가사키로 가서 네덜란드어를 익히고 네덜란드어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껴
영어도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1860년 막부의 견외사절로 3회에 걸쳐 해외를 여행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그가 집필한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등의 서적은 메이지 유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인도를 찾아가는 신항로를 개척하는데 가장 앞장선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희망봉을 발견하고, 인도를 거친 포르투갈의 무역선은 머나먼 동쪽나라 일본에 이르렀고
마침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 있던 전국시대에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전해주게 된다.
전국시대에 유입된 조총은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렸고,
수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막판에 어처구니 없는 배신으로 전국통일이라는 과실은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돌아갔지만...
다만 포르투갈은 무기만 수출한 것이 아니었다.
조총과 함께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선보이게 되니 이것은 교리 자체가 참으로 신선한 사상이었다.
천황보다 위에 있다는 하나님과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평등사상은 막부에게 있어서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천주교 신자가 늘어나게 되고, 세력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게 된다.
실제로 1637년 시마바라에서는 무거운 세금과 천주교 탄압에 짓눌린 백성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이 발생했고, 여기에 가담한 천주교 신자만 3만 7천명에 달했다.
결국 진압되긴 했지만, 이를 계기로 에도 정부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실감했고
일본 국내에서 천주교를 엄격히 금지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의 명물이 된 카스테라는 스페인의 스펀지케이크가 전래된 것이다.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만들어 먹던 빵이라고 해서 '카스테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처형된 26인 성인순교지.
자세히 보면 두 명의 나이어린 소년도 눈에 띈다.
2. 포르투갈 다음으로 일본에 접근한 네덜란드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포르투갈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틈을 타, 네덜란드가 접근한다.
당시 네덜란드는 구교와 신교의 대립 속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만든
신생국가였기 때문에 구교였던 포르투갈과는 대립관계였다.
이들은 구교인 천주교의 악습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강압적으로 포교하려고 하지 않았고, 칼뱅의 실용주의를
따라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나라였기에, 상업과 종교를 엄격히 분리한 에도 정부의 조건에 순순히 응해왔다.
하지만 크게 당한(?) 적이 있던 에도 막부는 이들이 혹시라도 기독교를 전파할까 싶어
에도에서 먼 규슈의 어촌 나가사키를 통해서만 교역할 것을 허가했고,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인들의 집단 거류지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데지마'다.
데지마는 부드러운 곡선 모양의 인공섬으로 육지와는 달랑 다리 하나로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접근할 수가 없었고,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비록 서양인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나가사키 시민들은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당시 네덜란드를
뜻하는 홀랜드(Holand)를 일본어로 발음해 '오란다상'이라고 불렀다.
이 오란다상이라는 명칭은 이후에 코가 크고 피부가 하얀 백인들은 총칭하는 단어로 발전해, 그들이
다니던 거리를 '오란다 자카'라고 부르는 등, 서양인의 대명사가 된다.
▶네덜란드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인공섬 데지마.
현재는 주변이 매립되었지만 에도시대만 해도 단 하나의 통로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고립된 섬이었다.
▶데지마에 있는 유적에는 'VOC'라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로고가 남아있다.
▶네덜란드인들이 거닐던 오란다 자카. 반듯하게 정비된 이곳 주변에는 현재 학교와 주택이 들어서 있다.
3.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꽃핀 학문, '난학'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데지마를 중심으로한 네덜란드의 학문은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측량술, 조선술 등 수많은 서양식 학문이 전해졌는데, 이중 일본인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외과수술이었다.
당시의 의학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한방이 전부여서 기껏해야 침을 놓는 것이 전부인
동양의학의 입장에서 실제로 살을 찟고 뼈를 자르는 서양의 외과수술은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것은 데지마를 출입하던 일본 지식층을 통해 전파되었고, 여러 난방의(蘭方醫)들의 노력으로 1774년에는
일본 해부학의 신기원을 마련한 '해체신서'가 발간되기에 이른다.
난학을 통해 축적된 지식은 개화기 시절 새로운 학문을 찾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난학을 공부한
사람 중 탈아입구론을 주장하며 일본 근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기도 한다. 이들이 일본 근대 문명과 메이지 시대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데지마를 중심으로 서양식 학문이 유입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끈 것은 서양식 외과 수술과 해부학.
에도시대 후기에는 '난학'이라고 해서 네덜란드에서 유입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 1만엔권 앞면을 장식하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화.
난학을 배우고자 열아홉 살에 나가사키로 가서 네덜란드어를 익히고 네덜란드어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껴
영어도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1860년 막부의 견외사절로 3회에 걸쳐 해외를 여행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그가 집필한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등의 서적은 메이지 유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